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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 이야기

무예도보통지 무기 설명

장 창(長 槍)

길이는 1장 5척 창자루는 주목이 제일이라고 척계광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중국식과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즉, '오늘날 창끝에 혈조가 있다. 창날 아랫부분에 작은 석반을 대고 창자루 아래에 준이 있다.'고 하여 훨씬 발전한 장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기원은 '치우 황제가 더불어 싸운 것이 창이고 제갈량이 나무로 창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길이가 1장 2푼이고 창끝은 철로 되어 있다.'에서 밝히고 있다.
장창 지법은 중국에서 양씨가 정통하였다. 기예로서의 장창 법은 전보와 후보로 나뉘어서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효신서에 나오는 장창법 24세중 명 진영에서 조차 12세만 전해져 온 것을 한교가 창조 개발한 것이다. 즉 기효신서에 나오는 장창법 24세를 새로 구성하고 조선인의 체격과 정서에 맞게 창조하였거나 혹은 전래의 장창법을 체계화 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기효 신서와 순서, 풀이 내용, 그림이 모두 다르다.)
명의 원병이 평양성을 탈환한 것도 주로 장창 돌격법에 의존한 것이라 한다.




죽장창(竹長槍) 

길이는 20자 머릿날이 4치 손잡이 이상은 물감을 바른다.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OO에서 '지금 연습하고 있는 죽창병은 통대나무를 쓰는데 위는 얕은 날을 세운다. 그러나 가볍고 허하여 단연록에 인용된 바 적죽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나 오직 이러한 수긍에 속하나 장창의 자루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라고 말함으로서 중국의 문헌과 금식과의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기예 자체는 다른 것에 비하여 단조로운 편이나 병장기가 길고 창끝의 날카로운 날로써 좌우로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적을 압도 할 수 있다.



기 창(旗 槍)

'날의 길이가 9치, 자루의 길이 9자 붉은 칠을 하고 석반이하는 검고 흰 칠을 한다. 다섯째 마디 쯤에 황색이나 홍색의 작은 기를 단다.'
중국의 기록에서는 기창이 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의 기록에서는 고려사 여복지를 인용하여 예시함으로써 고려 시대에 기창이 의장용으로써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무예 도보 통지에 24반 무예 중 1반으로 편성한 취지로서 '명의 성조가 지녔던 마삭의류회고 고려의 여복지의 기재되어 있는 노부의 기물이며 기를 단 창으로서 무릇 군오를 이루고 각 장이 병기를 잡고 호위하는 자세를 익힌 것인 즉 대저 깃대에 칼날을 대는 것은 그치고 찌르는 기술을 전함이니 농기구 등을 병기로 하는 것보다 현명하다. 따라서 이제 별도로 一槍(일창)을 갖추어 그 勢法(세법)을 연습하도록 한다.'에서 밝히고 있다.
기예로서의 기창은 중견을 습격하거나 기습을 당했을 때의 혼전에 대비한 것이기 때문에 저돌적인 돌격 자세와 함께 전투 좌우로 자유자재한 공격법을 습득하게 위한 기법으로 편성되었다.





당 파

길이는 7자 6치 무게 5근 일명 삼지창이라 한다.
당파의 종류로는 철파와 목파의 두 종류가 있다. 기예로서의 당파는 보병대 보병, 보병대 기병으로 대적할 수 있도록 편성되어 있고 찌르고 치고 잡아채는 데 있어서 우수한 병기로서 병사들의 무기로서 널리 쓰여졌다.(사극에서 병사들의 대부분이 이 당파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낭 선

길이는 1장 5척, 무게 7근, 죽제, 금제의 2종이 있다.
척계광이 왜와 논 가운데서 싸울 때 진용을 설치하는데 질려와 거마목을 사용할 수 없어서 낭선을 제작하였다.
기예로서의 낭선은 척계광이 변방 방어를 목적으로 창안한 무예인 만큼 전투적 실용성이 큰 무예이고 무거운 무기여서 힘센 사람을 골라 이 무기를 사용케 하여야 했다. 따라서 그 자세동작이 중후하고 위력적인 것이 특징이다.


쌍수도(雙手刀) 

본명:장도 속칭:용검,평검
척계광은 '칼날의 길이 5척 칼자루 1척 5촌 무게 2근 8량이다. 이 칼은 왜구가 중국을 침범하면서 이 칼이 보이기 시작하였다.'라고 하여 명시대에 사용하게 된 경위를 말하고 있다. 이 칼의 기원은 주나라까지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것이나 당시에는 왜인들이 주로 사용하였고 이의 대비책으로 도보가 만들어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 두 손을 사용하기 때문에 쌍수도라고 부르지만 당시 이미 요도로 대용하고 있었다.
기예로서의 쌍수도는 왜구의 침략을 당하여 그 피해가 막대함으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실전을 목적으로 고안된 것인 만큼 반격을 받아 물러나는 수도 있으나 막고 치면서 계속 전진하게 되어 있다. 예도 보다 칼 길이가 2척 2촌 정도 더 길어 위력적이나 동양인의 보통 체격으로서는 구사하기가 불편하다


예 도(銳 刀)

본명:단도
일명 환도라고 하며 칼날의 길이 3척 3촌, 자루의 길이 1척 무게는 1근 8량이다.
모원의를 인용하여 '옛날의 칼은 전투에 사용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나라 태종에게는 검사 천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그 법이 전하지 않는다. 간잔편에 결기가 있으나 그 설이 상세하지 못하다. 근래에 호사자가 있어서 조선에서 얻었는게 그 세법이 구비되어 있었다.' 라고 하여 중국에서 잃어버린 세법을 조선에서 구하였다고 하나 칼의 기원으로 관자가 '치우가 검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검의 처음이다.'라고 하여 검의 기원이 조선이라는 것을 밝혀 주고 있으므로 본래 조선의 검법이 당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원의는 또한 '조선의 세법은 먼저 안법, 격법, 세법, 자법을 익힌다. 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표두격, 과좌격, 과우격, 좌익격, 우익격이다. 자법에도 다서 가지가 있는데 역린자, 단복자, 쌍명자, 좌협자, 우협자이다. 각법에도 거정각, 선풍각, 어거각 세 가지가 있다. 세법에도 봉두세, 호혈세, 등교세 세 가지가 있다.' 그 요결을 제시하고 있다.
{사물기원} 석명에서 '모원의는 중국에 검술이 부전하고 기물도 전하지 않음을 탄식하여 홀로 그 검보를 찬술하였고 그림이 전하는데 하나는 조선에서 비결을 얻었고 하나는 그 식을 해외에서 얻었다 하는 것에 의문을 제시하고 그 뜻을 추측하기 어렵다.'라고 하여 모원의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또한
무예 도보 통지범례 편에서 '예도는 이 미모씨의 세법으로 도보를 만들었으니 지금 연습하는 보와는 아주 다른 까닭에서 부득불 금보로써 별도로 총보를 만들었다. 또 모설해를 별도로 만들어서 이미 익힌 자는 배운 것을 잊지 않게 하며 아직 익히지 아니한 자는 이런 책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라고 하여 이미 조선에서는 이미 그 법이 더욱 개발되어 폐기되다시피 한 법을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고 조선에서는 전래되어 오던 법을 더욱 개발하여 그 법의 우수성을 알 수 있다.
기예로서의 예도는 검법의 기초를 이룸과 동시에 가장 다양하고 완벽한 체계를 갖춘 것이다. 즉 거정세를 비롯하여 24세법과 [增(증)]으로서 세 가지 세법을 합하여 27세법이 있고 이를 연결시켜 총보로 수련하도록 되어 있다. 24세법에는 그 세법 하나 하나가 대개 3개의 자세 동작을 포함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70~80세의 자세 동작이 있다.


왜 검(倭 劍)

일본도는 大 小 長 短 이 같지 않고 일인은 보통 세자루의 칼을 차고 다닌다.
왜검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경위로서 숙종조 군교 김체건이 사신으로 따라 갔다가 검보를 얻어서 그 술을 배웠다고 한다.
기예로서의 왜검은 토유류, 운광류, 선유류, 유피류의 사류와 교전보로 구성되는데 다른 검법과는 달리 막고 쳐들어 가는 것 만이다. 즉, 무수한 전투과정에 전투적 실용성 외에 자세 동작은 제거해 버리고만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쌍검은 칼날 길이 2척 5촌, 자루의 길이 5촌 5푼, 무게 8량이다. (이제 구별하지 아니하고 만들어서 요도의 가장 짧은 것을 택하여 썼다.)
예기도식에 이르기를 녹영(직예와 각성의 한군영을 녹기라 한다.)의 쌍도는 좌우에서 쌍으로 쥐는데 전체 길이가 각 2척 1촌 1푼이며 칼날길이가 1척 6촌, 넓이가 1촌이다. 칼날 아래 입구(사투리에 "교"라는 것은 공을 말한다. 주에 곧 창날 아래 입구이다. 칼은 둥근 것을 쓴다. 쌍도는 각각 원의 반쪽으로 한다. 그것을 아우르면 하나의 둥근 칼자루가 된다.)는 반원이 되며 두께는 2푼, 아울러서 칼집에 넣으면 자루길이 4촌 9푼이며 목질은 전홍이며 끝은 철로 되었다. 점자의 음은 검이다. 정자통에 이르기를 무릇 기기의 양머리 교합하는 데는 철편을 써서 땜질한다. 혹은 각이 구부러지는 곳에는 철편으로 양머리를 묶어 고정시키는데 이것을 모두 검이라 한다. 녹영쌍도는 가장 짧은 칼이며 쌍도를 한 칼집에 꽂는데 그 법을 취할 만하다.
무편에 이르기를 송나라 태종이 용사 수백명을 선발하여 칼춤을 가르쳐서 칼을 공중에 던지고 그 몸을 날려서 좌우에서 받을 수 있었다. 거란이 보낸 사신을 맞이하여 편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로 인하여 검사가 나와서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북소리에 맞추어 칼날을 휘두르며 뛰면서 칼을 던졌다가 받고 하니 서릿발 같은 칼과 누빛 같은 칼날이 공중에 가득히 날며 춤추니 거란 사신이 이것을 보고 두려운 얼굴빛을 하였다. 매번 성을 순략할 때 빛나는 무사들이 칼춤을 추며 앞에서 인도하니 적의 무리들이 성에 올라와서 바라보고는 간이 서늘하여졌다고 한다.
---덧붙임: 기예로서의 쌍검은 좌우 양손으로 전퇴회전 하면서 구사하는 검법으로 쌍검을 사용하기 때문에 방어가 유리하고 변화 불측이라는



월 도(月 刀)

자루 길이 6척 4촌, 날길이 2척 8촌 무게 3근 14량
'무비지에 그려진 언월도와 예기 도식에 그려진 것과 서로 같다. 오직 무비지에 그려진 것은 털깃 단 것을 중점을 두었고 예기 도식에 그려진 것은 털깃 단 것이 빠졌다. 우리 나라의 월도는 얇아서 가을의 가랑잎 모양처럼 조열하며 중국의 제도는 위명을 떨치므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여 우수한 것은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왜검을 파하는데 우수한 기능을 발휘하여 평양성 전투와 도산 전투에서 왜검을 격파하였다.
도법은 관우의 36도법이 있는데 다 전하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으며 '어떤 싸움에서도 병장기가 부딪치면 굴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刀 중에서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모원의는 월도를 평하기를 '전중에서는 쓸 수 없다.'라고 했으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왜검과의 대적에는 탁월한 성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협 도(挾 刀)

중국의 미첨도와 왜국의 장도와 비슷하다.
협도는 월도 보다 길고 무거워서 도검류 중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것으로 그 기예가 중후하고 위력적이다.
왜인들이 전투시에 이를(왜의 장도) 진을 깨는데 사용했다 함은 이런 이유에서다.


등 패(藤 牌)

오래된 거친 등나무와 대껍질을 촘촘히 짜서 만들며 병사는 일패를 들고 요도를 차고 표창을 잡는다.
낭선과 같은 무겁고 긴 무기를 상대하는게 우수하다. 등패의 유래는 남만(베트남)으로부터 나왔다고 전해진다.


곤 봉(棍 棒)

길이는 7척 무게는 3근 8량, 칼날 길이 2촌, 칠 때는 봉의 이점을 이용하고 찌르면 칼날의 이점을 이용한다.
곤은 소림을 으뜸으로 한다고 하였다.
[案]에서 '임진란은 3국의 정예가 모여서 중국의 장창, 조선의 편전, 왜의 조총이 유명해졌다.'라고 하면서 장창이 진실로 무예의 왕이며 곤 역시 무예 중의 으뜸이 된다고 하였다. 즉 창과 곤은 서로 표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곤봉의 기예는 기예 질의에도 말하는 보와 같이 '곤봉은 힘을 음양으로 번갈아 쓰기 때문에 패는 스스로 전복된다.'라고 하여 등패를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곤봉보를 살펴보면 척의 기효신서에서는 다만 세 명 만을 전하고 있음에 반해
무예 도보 통지의 곤봉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며서 하나의 교전보를 이루고 있다. 이는 기효신서가 단순히 세 명을 정리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에 비해 무예 도보 통지 상의 곤봉보는 수련을 위주로 하는 도보이다.


편 곤(鞭 棍)

편곤은 편이 8척 9촌 자편이 2척 2촌 5푼이다.
편곤의 제도는 중국식과 다른데 예기 도식에 실려 있는 금식은 고리가 여섯 개 달리고 중국식에 비해 짧다. 화식은 철 체인이 연이어져 있는데 도리깨와 같다.
병자호란 때 금군이 고양에서 적을 막는데 대패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편곤의 제도가 청에 비해 조열 하였기 때문이다.
편곤은 특히 성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수성, 공성전에 유리한 무기이다.





기 창(騎槍)

길이는 15척으로 보병창과 같다.
문헌 비고를 인용하여 '숙종32년(1706년) 삼갑사를 파하고 대신 기창교전의 법을 두었다.' (관무재 및 중순시에 기창은 2인이 교전을 세 번 한다.)
경국 대전에서 무과 시취의 제도로써 기창의 내용을 싣고 있다.
무예 도보 통지상의 기창과는 서로 다르므로 내용을 함께 수록한다고 하여 조선 초기부터 기창은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존재함을 알려주고 있다.
고구려 시대 기마 전투도를 볼 때 기창이 존재했었다.



격 구

 

 

 

 

 

 

 

 

 

 

 

 

 

 

 

고려 시대부터 귀족 사이에서 이루어진 놀이로서 격구를 할 때는 사치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격구는 그 자체가 무예는 아니지만 무예 수련자가 아니고서는 구사할 수 없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특히 잘했다고 전해진다.

 

 

 

 

 

 

 

 

 

 

 

 

 

 

 

 

마상 편곤

마상편곤은 편이 6척 5촌 자편이 1척 6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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