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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공연이야기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장군은???


구름을 버서난달처럼에 국난이 3가지가 일어난다. 정여립의난, 이몽학의난,그리고 임진왜란 재미있게 영화를본날에 당진에게신 최재근회장님께(본국무예협회) 연락이 왔다. 간단한하게 무술 시연을 해야되는데 사람이필요하다고  무술공연 참여를 위해 당진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어디서 공연하는지도 모른체 당진에 도착해보니 무술시범을 하는곳과 최호장군이라고 하는 장군에대해 설명을 들을수 있었다. 알고보니 최재근회장님의 할아버지라고해야되나 조상분중 하나라고해야되......말하기가 어렵지만 유명한장군인데 이런장군의 이름을 모르고 있으니 ㅜ.ㅜ 반성이다.

                           최호장군의 영정

임진왜란의 영웅

충원공 최호장군은
조선 중종 31년(1536), 삼국시대 석학인 최치원선생의16대 후송으로 부친 최한정장궁의 사남매중 4남으로 현재의 군포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태어 났습니다.
 
어머니 광주 김씨가 장군을 잉태하였을 때 넓은 호숫가에서 놀던 백마가 힘차게 집안으로 달려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호수 호(湖)자를 써서 '호'라고 지었다고 한다.
선조7년(1574)무과병과에 급제하였고 선조9년(1576)에는 무과중시갑에 장원급제하였다.
아버지가 뛰어난 장군이었기에 아버지를 따라 북방 및 및 국토의요충지를다니는 기회를 가지게 된 장군은 아버지에게 일찍부터 무인이 되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후 선조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서울을떠나 의주로 옴길깨 선조의 호위하였고 임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큰공을 세웠다.

선조29년(1596) 충전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지 3개월만에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난을 이르킨다. 이에 장군은 신속 과감하게 병력을 동원하여 이몽학의난을 평정하는데 큰공을세운다. 이때의 공으로 최호장군은 청난2등공신으로 책봉된다.

최회장군은 삼국수군통제사인 이순신보다9살연상으로 무장의결력도 선배였기때문에 이순신장군은 최호장군을 선배의 예로 대하였는데 이순신장군 투옥후 원균통제사가 이끄는 연합함대의 칠천량 해전에서 왜적함댕의 야습에대응하여분전하였으나 숫적인 열세로 선조30년(1597)62세로 장렬이 순국한 살신성인의 무장이다.

무인집안 사람이라서그런가 조선시대 백발인 성성할 나이인50이 넘어서 까지 임진왜란 최선봉에 서서 싸우신분입니다.

                                            장군의후손 최재근 회장님

유명한장군의 추모제 식전행사로 무예공연이라니.... 의미 있는곳에서 무에공연이였다. 관중들 대부분이 할아버지 할머님들이라서 그런지 아주 점잔은 모습의 박수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권법의 모습중

사대봉군의 명가문

최호장군이 순국하신 후 132년이지난 영조5년(1729)에 임금의 하사금으로 창건하여 충의사라고 부렀는데 사당에는 계원군 최한정(최호장군부친) 계성군 최호 계흥군 최몽란(최호장군아들) 계산군 최효열(장군의 손자)등 가족들의 위패를 사대봉군의 위패를 모셨다.
봉군이란 와이나 총친이나 공을 세운 신하에게 주던 명에직책이다. 이목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2등공신으로 책록되어 자현대부,병조판서겸,의금부사로 추종되고 계성군으로 봉군되 었다.

최호장군은 아버지 최호장군 그리고 아들과 손자까지 계산군으로 봉군되면서 사대가 봉군이되는 명가문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