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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 이야기

무에도보통지 서문

임금이 지은 <무예도보통지> 서문

  우리나라 군사훈련제도를 보면 삼군三軍(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은 서울 근교近郊에서 조련調練(부대 단위 훈련. 기동훈련)했고, 위사衛士(임금을 호위하는 숙위무사)는 금원禁苑(궁궐의 후원)에서 훈련하였다. 금원에서 연병練兵(군사훈련)하는 것은 광묘조光廟朝(제7대 세조世祖) 때에 가장 활발했지만 궁시弓矢(활쏘기) 한 가지 기예技藝(일기一技)에 그쳤을 뿐 창검槍劍을 비롯한 다른 기예技藝를 훈련시켰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선묘宣廟(선조宣祖)께서 왜구倭寇의 침략(임진왜란)을 평정하시고 나서 척계광戚繼光(중국 남해안지방에서 왜구를 물리쳤던 명明나라 장수)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구해 보시고, 훈국랑訓局郞 한교韓嶠를 명明나라 장사將士들에게 보내어 <기효신서>에 수록돼 있는 무술기법을 두루 물어서 곤봉棍棒을 비롯한 6기六技를 모두 연구하고 습득하게 한 후에 <도보圖譜>(<무예제보武藝諸譜>)를 만들도록 하시었다.

  효묘孝廟(효종孝宗)께서는 전대前代에 이룩한 빛나는 업적을 이어받아 내열內閱(궁궐 내에서 사열)을 자주 시행하시었으므로 수법과 기예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고, 격자지법擊刺之法(치고 찌르는 무술이니, 바로 단병短兵무술)의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단련團練(단체훈련)하는 범위가 약간은 넓어졌다. 그러나 6기六技 뿐이었으므로 무예의 종류가 많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기사년己巳年(영조英祖 25, 1749)에 사도세자思悼世子께서 대리청정代理聽政(임금을 대리하여 정치하는 것)을 맡아 서무庶務(일반행정업무)를 관장하셨을 때 죽장창竹長槍(대나무창)을 비롯한 12기十二技를 더 늘려 <도보圖譜>(<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하시고 6기六技에 연결시켜 함께 강습講習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현륭원지顯隆園志>에 수록돼 있으며 18기十八技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 무사들에게) 무의식武儀式과 전형典型(무예의 기본전범基本典範)을 계속 수련하도록 하면서 기예騎藝(말을 타고 하는 무예)를 비롯한 6기六技를 다시 더 늘려 24기二十四技를 수련토록 했다. 그리고 이미 고증에 능한 자 2~3명에게 명하여 원原.속續 <도보圖譜>(원原은 선조宣祖때에 편찬한 한교의 <무예제보>, 속續은 영조英祖때에 사도세자가 주도하여 편찬한 <무예신보>)를 은괄檃括(의거하여 개작改作)하고 의義(뜻). 예例(기법技法).전箋(주해).석釋(풀이)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하는 한편 원류源流를 밝히고 제도制度를 고쳐, 명물名物(명칭과 실제 기술)과 기예技藝와 술법術法의 오묘한 쓰임새를 한 권의 책에 담아 펴내면서 책이름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知>라 하였다.

  대체로 격자지법擊刺之法을 더 자세히 증보增補함으로써 금원禁苑에서 군사들이 훈련하는 제대로 된 법식이 비로소 나오게 되었으니, 교외에서 군사훈련을 할 때에 지침서로 삼고 있는 오위五衛의 진법陳法인 <병장도설兵將圖設>의 교련지남郊練指南(교외郊外훈련의 지침指針)과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전승傳乘될 터이니 어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행진行陣(포진布陣.진을 침)을 먼저하고 기예技藝를 뒤에 하는 건 병가兵家의 상담常談(늘 하는 말)이라고 했는데, 병가兵家의 오교五敎(다섯 가지 원칙)에서 기예技藝(무예)훈련을 두 번째로 하고 행진行陣을 세 번째로 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대개 해와 달과 별의 운행運行을 밝혀내고, 변화를 살펴 머무를(방어) 때에는 담(울타리)처럼 튼튼히 하고, 움직일(진격) 때에는 풍우風雨처럼 신속히 해야만 진법陳法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맞부딪쳐 공격할 때에 안팎으로 치고 박는 것은 부득불 손발과 기계器械(무기)를 써야만 하는데, 행진行陣할 때에 대적할 자가 없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치고 찌르는 무술이 숙달되고 민첩한 데에 달려 있으니, 병법兵法을 논하는 순서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 책을 간행하는 까닭은 중위中尉(서울을 지키는 군사)와 재관材官(재주가 있고 강궁强弓을 쓰는 기마騎馬 무관)들이 날로 용호지도龍虎之韜(병법. 도韜는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줄인 말)을 익혀 모두 바르고 용맹스러운 비휴豼貅(맹수의 이름에서 비롯된 무사라는 말)가 되어 나라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강화하여 이 책을 저술하고 간행토록 했는데, 그 참뜻은 호국무예는 억만년 세월이 흘러가도 한결같이 교유敎諭(가르치고 타이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군들의 분투노력을 당부하노라.


내가 즉위한지 14째 되는 경술년庚戌年(1790) 초여름[4월]